동구에 오면 관광愛 물들어요
여인이 그려진 옛 그림
송시열 [宋時烈, 1607(선조 40년)~1689(숙종 15년)]
  • 부 : 송갑조(宋甲祖)
  • 호 : 우암·화장동주(號=尤庵·華障同主)
  • 시호 : 문정(文正)
  • 본관 : 은진(恩津)
  • 주요저서 : 송자대전(宋子大全)
  • 동구 소제동에 살았음

조선시대의 도학가(道學家)요 대 정치가인 송시열 선생은 이 고장에 많은 제자와 일화를 남기신 분이다. 선생은 선조 40년(1607년)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군 구룡리(忠淸北道 沃川郡 九龍里)에서 송갑조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어머니 곽(郭)씨부인이 밝은 달과 같은 구슬을 삼키는 태몽을 얻어 그를 잉태하였다고 한다. 선생이 나기 전날 밤에는 그의 아버지 송갑조가 마침 종가에 제사를 모시러 청산(靑山)땅에 머물고 있었다. 한밤중에 홀연 공자님이 여러 제자를 거느리고 자기 집에 오는 꿈을 꾸어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옥동자를 낳았다는 소식을 받았다 한다.
집에 온 그는「이 아이는 성인이 주신 아들이다.」 「하여 성뢰(聖賚)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기골이 뛰어나게 장대하여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었으며 여덟 살 때부터 친척되는 송이창(宋爾昌)에게 글을 배웠다. 송이창은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아버지인데 그때부터 선생은 자기보다 위인 송준길과 같이 공부하게 되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 후 일생을 두고 학문과 정치생활에 있어 그와 고락을 같이하는 사이가 되었다.

선생은 22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인조 8년(1630년)에 아버지의 3년 상을 마친 그는 연산에 은거하는 당대의 거유(巨儒)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였다. 사계(沙溪)는 율곡의 으뜸가는 제자로서 예학(禮學)의 일인자이다. 우암은 이로써 율곡의 학통을 그대로 물려받게 되었다.
그러나 1년 뒤에는 사계가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그의 아들 신독재(愼獨齋)김집(金集)에게 다시 배워 학문을 대성했다. 이러한 당대 굴지의 학자 부자(父子)에게 정주(程朱)의 학을 배운 우암이 그것을 평생의 귀감으로 삼게 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인조11년(1633년) 선생은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하였다. 그 시험의 문제는 「일음일양(一陰一陽)을 도(道)라 한다.」라는 철학적 문제였다.
선생은 태극음양(太極陰陽)의 이치와 천지근원의 조화를 논한 문답식 논문을 제출하였다. 이때 시험관인 대제학 최명길(崔鳴吉)은 무릎을 치며 「일찍이 드물게 보던 선비가 생겼으니 이제 중국의 도학은 우리 동방으로 왔다. 」하고 극구 칭찬하였다고 한다. 이로부터 선생의 명성은 사방에 펼치게 되었다. 그해 10월에 경릉참봉(敬陵參奉)의 벼슬을 받았으나 나이 많은 어머니를 떠나 먼 곳에 머물 수 없다고 하여 곧 돌아오고 말았다.
인조13(1635년)에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스승이 되니 봉림은 즉 후일의 효종으로 선생과의 인연은 이렇게 해서 맺어졌던 것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매(1636년) 남한산성으로 어가(御駕)를 모시고 갔다가 성이 함락된 후에는 이내 벼슬을 내놓고 향리 회덕으로 돌아왔다.
난리를 겪은 뒤로는 남한산성의 수치를 크게 분통히 여겨 황간땅에 은거했다. 이때의 선생을 묘사한 글 중에「……독서에만 전념하되 끼니가 간데없어도 태연하게 입을 열어 세상일을 말하지 않으며, 혹 종일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기곤 하였다.」라는 구절이 있어 비분강개한 중에서도 도학을 닦는데 게을리하지 않던 그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이러하기를 십여 수년에 조정에서 지평, 장령 등 대간의 요직으로 소명하였으나 때가 아님을 알고 있는 선생은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으며 오로지 학문만을 연마하였다. 이때 인근에서 도학을 닦던 동춘당(同春堂) 송준길이 배움을 청하는 무리에게 사양하되,「황간땅에 큰 선생이 있는데도 그대들이 나를 찾아옴은 어인 까닭인가?」라 한 것은 다만 겸사의 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효종이 즉위하자(1649년) 다시 부름을 받아 진선(進善) 집의(執義) 등의 자리에 있으면서 정책을 건의하는 등 활약을 하였다. 그때부터 선생은 효종과 특히 정분이 두터웠다.
효종은 정치기강을 바로잡고 정부의 새로운 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당시 김자점 일당을 몰아내고 학문과 행실이 맑고 깨끗한 학자들을 불러서 썼다. 조정에 나온 선생은 정치를 바로잡는데 있어서 절대 필요한 기축봉사(己丑封事)를 왕에게 아뢰었다. 이는 대략 임금의 덕을 함양하고 기강확립을 서둘러 국력을 기른 뒤에 북벌을 도모하자는 내용의 13개 항목이다.
이때 김자점은 파면을 당한 뒤로 불평을 품고 역관 이덕장을 시켜 청나라 조정에 무고를 하였다. 그리고 인조의 능지(陵誌)에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은 것도 아울러 고발하였다. 이 능지는 선생이 지으신 것이었다. 당시는 청나라가 우리나라를 무력으로 굴복시킨 때라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던 시대이다.

효종은 선생에게 내리는 교지(敎旨:사령장)에 청의 연호를 쓰지 않았고, 선생도 그와 같이 하였던 것이다. 이는 청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이며 오랑캐를 정벌(북벌)하여 병자의 치욕을 씻고자 한 군신간의 맹약이며 주체의식의 발로였다. 이로 인하여 청의 압력이 가하여지자 선생은 자진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 향리에 은거한 선생은 윤선거, 이유태, 유계 등 학우들과 서원에 모여 학술을 토론하고 돌아가신 옛 사계선생이 저술한 의례문해(疑禮問解)를 교정하며 혹은 율곡·조헌·사계등 선유들의 연보나 행장을 기술하여 학계의 공적을 추모하였다.

효종 9년(1658년) 다시 부름을 받은 선생은 찬선에서 이조판서로 승진하였다.
어느 겨울날 효종은,「이조판서 송시열이 입시할 적에 입은 옥을 보니 너무 얇아서 이 추위에 질병이 생길까 근심되니 털옷 한 벌을 즉시 하사하라.」하였다. 선생은 이 말을 전해 듣고「지금 우리의 처지로서 누더기를 입더라도 참아 가면서 국력을 길러야 할 터이니 실오리 한 파람도 허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사양했지만 왕은,「경은 내가 옷을 주는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장차 요동평야의 눈보라치는 벌판에서 이 털옷을 입고 같이 달려 보자는 것이요.」라고 하였다 한다.
효종의 특별한 유시에 선생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이 뜻깊은 털옷을 받아서 돌아와 깊이 간직해 두고 북벌할 날을 기다렸던 것이다.

이는 북벌과 관계되는 임금과의 일화이지만 선생의 평소 생활은 검소하였다. 비단 의복은 몸에 걸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평생 요를 깔지 않았다. 문인들이 혹 그 이유를 물으면「집안이 가난하여 우리 부모 내외께서는 요를 깔지 않고 지내셨는데 내가 어찌 요를 깔겠는가?」라고 하여 검소한 선생의 생활모습을 엿볼 수가 있다.

일찍이 사계문하에 출입할 때 회덕(지금의 소제동)에서 연산가지 근 백리의 길을 매일같이 책과 도시락을 메고 수학하러 다녔다. 이 때 선생은 흔히 연산 못 미쳐 10리쯤에서 점심밥의 절반을 먹고 나머지는 싸서 나뭇가지에 걸어두었다가 오는 길에 먹곤 하였다. 선생의 걸음이 어찌나 빨랐던지 사계선생 생신 날 선생을 위하여 만든 수수팥떡을 가지고 연산 선생님댁에 왔을 때까지도 그 떡이 식지 않았다고 한다.

선생은 본래 말이 적었다. 반가운 사람을 만나도 안부인사가 끝나면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학문적인 문제나 의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도도히 흘러서 그칠 줄을 몰랐다. 그래서 한번은 김익희가,
「말이 너무 적어서 할 말도 다 안 하는 것이 탓할 일인데 그대는 말이 너무 많으니 그것이 결점이다. 우(尤)자를 넣어서 호를 삼으라.」고 하였다. 선생이「좋은 호라면 내가 사양해야겠지만 좋지 못한 호를 어찌 사양하겠는가?」라고 하여 드디어 호를 우암이라 하였다.

선생이 효종의 부름을 받은 때는 50세였다. 이때 그는 평생 배운 바를 국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선생을 총애하던 효종이 승하하자 조정에서는 예송논쟁으로 시끄러워졌다. 이 예송문제는 처음에는 예설 즉 복제의 시비요, 학설의 시비논쟁인 듯하던 것이 뒤에 우암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변하고 말았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당쟁은 그 어느 한 사람의 공과보다도 그 시대가 안고 있었던 정치제도 및 제반제도와 사회, 경제적 모순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겠다. 그러므로 어느 한 사람에게 주도되었던 것 같이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보인다.
효종 승하후 벼슬을 물러난 선생은 그 뒤 다시 부름을 받아 조정의 중요관직을 거쳐 우상, 좌상에까지 이르렀으나 뜻은 항상 산천에 있었다.

푸른 물은 성낸 듯 말이 없구나
청산은 찡그린 듯 말이 없구나
조용히 자연의 뜻을 살피니
내 세파에 인연함을 싫어하노라

선생은 74세 되던 해에 모든 벼슬을 버리고 화양동에 은거하였다.
숙종 15년(1689년) 선생 83세에 왕세자(경종)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에 안치되고 이어 국문을 받기 위해 상경하던 도중 남인의 책동으로 정읍에서 사약을 받으니, 일세를 풍미하던 큰 별이 떨어졌다.
선생의 학문은 대체로 율곡선생의 이론을 계승하였으나 견해를 달리 한 점도 적지 않았다. 선생은 궁극적으로 성리학을 집대성하여 사학의종사(宗師)가 되었다.

선생은 28세부터 82세까지 50년간에 걸쳐 소명과 임명을 받은 것이 무려 109회이고 이에 응한 것은 26회밖에 되지 않는다. 또 888책으로 된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한 사람의 이름이 삼천번 이상 나오는 것은 선생 한 사람뿐이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당시의 큰 사건이든 작은 일이든, 아니면 좋은 일이었든 나쁜 일이었든 간에 선생이 관여되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당대에 선생이 차지했던 위치가 중요하였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선생이 행동한 바와 생애 자체가 기복이 심하고 파란이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나 뒷날에 선생의 언행을 적어 비평한 많은 글이 그를 찬양하기도 하고 헐뜯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그들이 너무나 양극을 이루어 선생의 참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러나 선생의 분명한 퇴진은「대의 성취」와「대의의 지킴」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숙종 20년(1694년)에 신원이 되었고, 문묘를 비롯해 많은 서원에 배향되어 후세 학자들의 추앙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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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9-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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