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에 오면 관광愛 물들어요
여인이 그려진 옛 그림
송병선 [宋秉璿, 1836(헌종 2년)~1905(광무 9년)]
  • 호 : 연제(淵薺)
  • 시호 : 문충(文忠)
  • 본관 : 은진(恩津)
  • 주요저서 : 연제집(淵薺集)
  • 동구 성남동에 살았음.

선생은 명문세가의 후손으로 한말의 거유(巨儒)이다. 그는 송시열의 9대 후손으로 동구 성남동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학행이 뛰어났으며 주위의 명망이 높아 일찍이 제주에 기용되었다. 그리고 이어 서연관·경연관의 벼슬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는 주로 향리의 사제에서 학문을 닦으며,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주시하며 몸가짐을 바로하였다. 고종으로부터 여덟 번이나 대사헌의 벼슬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러한 선생의 행동은 날로 기울어져가는 정국에 나아감이 선비의 택할 바가 아니라는 의리에 입각한 것이었다.

우리나라는 급기야는 1905년 11월 18일인 이토오(伊藤博文)의책동에 의해 강압적으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비보에 접한 선생은 식음을 전폐하고 「나라가 망하고 도가 망하였구나.」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통분해하였다. 그는 곧 상소하여 적신들의 매국한 죄를 극론하고 엄형을 내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아울러 을사조약을 철폐할 것을 말하였다.

선생은 나라가 위급하게 되자 곧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임금에게 십조봉사(十條封事)를 올려 나라를 바로잡을 것을 간하였다. 그 내용 가운데 제1조에 「적신들을 참수하고 왕법을 바로 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생은 임금 앞에 나아가 필연코 이를 실천에 옮기도록 촉구하였다. 이 때 고종은 높은 예우를 갖추어 그를 맞았다. 이에 선생은 다시 임금에게 아뢰기를 「나라가 있고서야 도가 있는데 이제 나라가 망하였으니 즉 도가 망한 것입니다. 폐하의 앞자리가 곧 내가 죽을 자리이니 주청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물러가지 않겠습니다.」하고 그의 뜻을 표시하였다. 이에 고종은 그 소청을 받아들이기를 약속하였다. 그리고 이때 장례원경(掌禮院卿) 남경철이 말하기를 돌아가서 상소가 받아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다고 전하였다.

선생은 궁중에서 일단 물러나왔다. 이 때 경무사 윤철규가 교자를 가지고와 말하기를 「일본헌병이 강박할 염려가 있으니 타라.」하고 선생을 속였다. 선생이 교자에서 내려보니 그곳은 남대문 밖이었다. 그러나 일본헌병이 뛰어와서 몸수색을 하고 임금의 명령이라 하며 강제로 선생을 열차에 태워 대전역에서 내리게 했다. 선생은 이같은 지경을 당하며 「한 걸음 옮기면 한 걸음 옮기는 치욕이 있고 두 걸음 옮기면 두 걸음 옮기는 치욕이 있다.」고 한탄하고 통분하면서 석남촌(지금 동구 판암동)에 있는 옛집으로 돌아왔다.
이에 선생은「죽음을 구하고자 하였으나 몸만 욕을 입었을 뿐이다.」라고 하고 순국자결하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선생은 의관을 정제하고 북쪽을 향해 재배하였다.

선생은 유소(遺疎)를 쓰고 또 자제, 문생 그리고 전국 유림에게 고결하는 유서를 만든 다음, 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이 때가 1905년 12월 30일의 일이었고, 선생의 나이 70세 때였다.
선생이 순국한 뒤에 의정대신(議政大臣)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충(文忠)이 내려졌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추서하였다.

동구 용운동에 있는 문충사(文忠祠)에는 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춘추에 제향하고 그가 평소에 쓰던 유품과 전적을 보관하고 있다.

  • 자료관리 담당부서
  • 관광문화체육과
  • 이상화 042-251-4204

최종수정일 2019-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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