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에 오면 관광愛 물들어요
여인이 그려진 옛 그림
박팽년 [朴彭年, 1417(태종 17년)~1456(세조 2년)]
  • 부 : 박중림(朴仲林)
  • 호 : 취금헌(醉琴軒)
  • 본관 : 순천(順川)
  • 동구 가양동 더퍼리에서 살았음.
금생여수라 한들 물마다 금이 나며,
옥출곤강인들 뫼마다 옥이나랴
아무리 여필종부라 한들 님마다 쫓으랴

이 시조는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함에 이에 의분을 느껴 끝내 불사이군의 정신으로 생애를 마친 사육신의 한 분인 박팽년 선생의 절개를 나타내는 글이다. 세종 때인 1434년에 알성문과에 합격할 때까지 부단히 학문에 정진하여 과묵한 주에 성실히 인간 수업을 쌓아왔다. 더구나 과거 급제 후 집현전 학사로 발탁되어 성삼문과 더불어 세종의 총애를 받으며, 그 당시 젊고 장래가 촉망되는 학력 있는 선비에게 내려주는 사가독서의 영광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세종이 돌아가시고 문종의 뒤를 이어 단종이 임금에 오르면서 나라는 어지러운 회오리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은 야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또 그를 싸고 도는 미묘한 움직임은 심상찮은 것이었다.

드디어 수양대군은 그의 저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당시의 충신이었던 김종서·황보인 그리고 안평대군까지 죽이고는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세조가 즉위하자 선생은 외방으로 나와 고향인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했으나, 전왕에 대한 충성심은 더욱더 불 솟았으며 세조의 불의에 대하여는 마음으로 용납할 수가 없었다. 뒷날 사육신을 세조가 친히 국문할 때 선생에게,「만일 네가 나를 섬긴다면 살려주겠다」라고 귓속말을 하자 선생은 이를 듣지 않고 한 번도 신(臣)이라 칭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의 재주와 덕을 아낀 세조는 은근히 타일러 말하기를,「네가 전에는 나의 앞에서 신하라 일컫더니 이제와서 신하라 일컫지 않음은 무슨 까닭이냐?」고 했다. 선생은「나는 상왕의 신하이지 당신의 신하는 아니오」라고 완강히 거부하였던 것이다. 이때 세조는 선생이 관찰사로 있으면서 자기에게 보낸 서신을 꺼내 다시 훑어 보고 깜짝 놀랐다. 임금에게 보낸 선생의 공문, 서신에 쓰인 그리 신(臣)자인 줄 알았는데 전부 거(巨)자였기 때문이었다.

1456년 선생은 형조참판이 되어 서울로 올라와 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김질등과 더불어 단종 복위운동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김질이 그의 장인 정창손에게 설득되어 밀고함으로써 붙들리는 몸이 되었다. 세조는 사육신은 모두가 뛰어난 선비였기에 그들을 회유시켜 자기의 신하가 되어 주기를 강권하고, 또 하나하나를 불러 마음을 바꾸도록 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끝내 말을 듣지 아니하자 잔인한 고문을 가하고 그를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이 때 박팽년 선생은 자신만의 죽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의 아들 여덟 명과 아버지, 동생 대년도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나 왕에 대한 모역을 하면 삼족을 멸하여 그 후손이 이어지지 못했다. 그런데 박팽년 선생의 둘째아들 순의 아내 이씨는 대구 관아의 관비가 되었으나 마침 임신중이어서 뒤에 아들을 낳자 여자 옷을 입혀 키우다가 성종 때 대구감영에 자수하여 나라에서 이를 용서해 선생의 가문이 계승되게 되었다 한다.

박팽년 선생은 세종 일대를 통하여 우리의 민족문화가 만발하고 부국강병과 민생안정이 이루어져 태평연월을 구가할 수 있었던 당대에 있어서 문화창조에 기여하면서 한 시대를 자기 모습대로 살다간 꿋꿋한 인물이다. 선생은 28세에 등과하여 성삼문·정인지 등과 함께 세종의 총애를 받으며 집현전 학사로 한글 창제에 큰 힘을 보태었고, 뒤에 문종을 보필했다. 선생은 천부적으로 성품이 침착했고, 특히 문장과 필법은 당대에 이름이 높아 집현전 학사들 중에서 단연코 뛰어났었다 한다. 선생의 강직한 성품은 일찍부터 나타나서 선생이 광주에 전답을 조금 갖고 있었는데 친구가 이르기를 녹을 먹는 신하가 전답이 왜 필요하냐고 힐난하자 곧 팔아버렸다는 것이다. 단종이 선위 할 때도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경회루 연못에 빠져 죽으려 하니 성삼문이 보고 급히 말리며, 우리가 살아서 상왕을 복위토록 도모해야지 누가 한단 말이오. 만일 일이 실패하면 그때 죽어도 늦지 않소.」라고 진정시켰다. 이 때 선생은 생각을 고쳐 뒤에 단종의 복위를 위해 형조참판에 취임하였다. 단조의 복위운동으로 선생은 죽임을 당하였고, 시신마저 갈기갈기 찢겨졌으나 선생의 인격과 문명은 뒷날에도 사람들의 추앙받는 바가 되었으니 선조가 조정 대신을 모아 놓고, 옛날 박팽년은 그가 천거하여 벼슬을 시켜준 친구들로부터 감사하다는 물건을 보냈으나 일절 받지 않았으니 그처럼 청렴결백한 사람도 드물다.」라고 했다.

박팽년 선생은 뒷날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과천의 민절서원과 홍주의 노운서원에서 제향하며, 중구 안영동 창계숭절사에 성삼문과 함께 춘추로 제향을 올리고 있다. 선생이 태어난 가양동 더퍼리는 그의 종조와 박씨 집안이 살던 곳이다. 이곳에는 선생의 유허비가 지금도 남아 있다. 선생은 세종 일대를 통하여 우리의 민족문화가 세계적 수준에 다다르고 부국강병과 민생안정이 이루어져 태평연월을 구가할 수 있었던 당대에 있어서 문화창조 발전에 기여한 지식계층이었으며 집현전 학사로서 그의 노력은 값있는 활동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나라의 대통을 바로 이어가기 위해 절개를 지켜 의롭게 죽은 선생의 시 한 수를 더 적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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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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